[중국 여행] 하늘 문이 열리는 도시, 웨이하이

2021. 3. 5. 15:27해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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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웨이하이 여행기

 

백제의 부흥을 꿈꿨던 장보고와 불사(不死)의 삶을 바라던 진시황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 가장 먼저 해가 뜨는 중국 땅 웨이하이에 다녀왔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한 시간이면 다다르는 가장 가까운 중국, 웨이하이(威海). 도착 직전,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웨이하이시의 풍경은 생각보다 소박하다. 붉은 기와 지붕을 얹은 조그만 집들이 네모 반듯하게 옹기종기 모여있다. 마치 우리나라의 6~70년대 모습을 보는 듯하다. 나중에 알고보니 웨이하이는 5,436㎢의 면적, 인구 250 여 만 명의 제법 큰 도시로 하늘에서 내가 본 것은 웨이하이에 속한 부속도시 영성시의 모습이었다.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장 근접해있어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은 도시가 웨이하이다. 까마득한 옛날에 신라인 장보고가 찾아와 신라원을 세웠고, 지금도 수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들어와 거주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공항에서 나와 처음 접한 웨이하이의 날씨는 한 시간 전 인천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없다. 우리나라와의 시차는 고작 한 시간. 명소마다 한국어로 된 간판들이 서 있고, 가는 곳마다 한국인 관광객들을 마주칠 수 있으며, 심지어 TV를 틀면 우리나라의 3개 공중파 방송의 프로그램들이 화면에 버젓히 나온다. ‘인천시 웨이하이 구’라는 농담이 새삼 와닿는 순간이다.

 

중국 웨이하이 여행기
중국 웨이하이 여행기
중국 웨이하이 여행기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기잡이를 생업 삼아 소박하게 살아가던 항구 도시 위해는 최근 급속한 경제 발달로 새로운 기로에 서있다. 특히 이곳 영성시는 작은 시골 어촌 마을의 이미지를 벗고 천혜의 자연 조건과 역사적 의미를 함께 갖춘 관광지의 모습으로 변모해가고 있는 중이다.  

 

 

해상왕의 못다 이룬 꿈을 좇아

   
신라인이 세운 사찰, 신라원. 웨이하이에는 가장 대표적인 신라원인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이 있다. 법화원은 820년 경 신라의 장군 장보고가 세운 사찰. 본래 당나라에 파병된 7만 신라군의 총사령관이던 장보고는 바다를 오가는 상선들의 순탄한 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이 지방 고유의 해신(海神) 적산대명신을 모신 절을 세우고 스님을 초청해 불경을 읽게 하였다. 그 때 처음 읽은 경전이 법화경이었다고 하여 사찰의 이름이 적산법화원이 되었다고 전한다.

 

중국 웨이하이 여행기

 

적산법화원 내의 장보고 기념관에는 약 10m 높이의 장보고 동상이 세워져 있다. 칼자루를 움켜쥔 채 바다를 향해 우뚝 서 있는 모습이 신라와 당을 오가며 바다를 호령하던 해상왕의 위용 그대로다. 장보고 기념관은 총 5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장보고의 어린시절을 비롯해 적산에 법화원을 건립하던 때와 신라로 돌아가 청해진(淸海鎭)을 건설하고 해상 무역에 나섰던 시기까지 장보고의 일대기를 그림과 유물 등을 통해 알려준다. 

 

중국 웨이하이 여행기

 

적산법화원을 나와 차를 타고 이동한다. 경사진 포장 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거대한 석상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법화원에 모셨다는 적산대명신을 형상화해서 만든 좌상. 200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옛 신라방의 흔적이 남아있는 영성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거대한 석상은 그리 달가운 것이 못된다. 선박의 안녕을 지켜준다는 본래 적산대명신의 유래와 달리 이 석상은 장보고의 기상을 누르기 위해 세워진 까닭이다. 넓은 바다를 호령하던 해상왕 장보고를 영웅처럼 생각한 사람들이 그를 숭배하듯 법화원에 들락거리자 이를 시샘한 이들이 장보고 동상보다 크고 웅장하게 신상을 만들어 산 위에 올려놓았다는 것. 숨은 이야기를 알고 나니 ‘관광지랍시고 무턱대고 다닐 것은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중국 웨이하이 여행기

 

성산두 일출 앞에서 불로의 생을 염원하다  


웨이하이는 중국 최동단의 도시다. 특히 웨이하이시의 동쪽 끝 성산두(청산터우, 成山头)에 가면 중국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다. 새벽 4시 반에 뜬다는 해를 보기 위해 일찌감치 길을 나선다. 뷰익트럭에 몸을 맡긴 채 구불구불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지나니 ‘중국의 희망봉’이라 불리는 성산두가 나타난다. 오랜 세월 세찬 파도와 바람에 의해 만들어진 기암괴석 위에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 길 끝에 높이 솟은 바위에는 붉은 글씨로 ‘천무진두(天無盡頭)’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하늘이 끝나는 곳’이라는 의미로 중국 땅 동쪽 끝에 새겨놓은 것이다. 

 

중국 웨이하이 여행기

 

멀리 수평선 너머로 아스라이 붉은 점이 솟구친다. 해수면 위로 머리를 쏙 내밀고 혀를 넘실거리는 아침 해가 짙은 해무(海霧)와 어울려 장관을 연출한다. 이곳 성산두에는 태양신이 산다는 전설이 있어 예로부터 중국 역대 황제들의 시찰 코스이기도 했다. 불로장생을 꿈꾸던 시황제(始皇帝)도 이곳을 두 번이나 찾아와 태양과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분서갱유(焚書坑儒)’ 등의 가혹한 정치로 지탄을 받았지만 마오쩌둥과 함께 중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역사 인물로 평가받는 시황제는 기원전 219년 성산두를 찾아와 대륙의 끝이라는 의미로 ‘천진두진동문(天盡頭秦東門)’이라는 여섯 글자를 남겼다.

 

중국 웨이하이 여행기
중국 웨이하이 여행기

 

이를 기념하듯 지금도 성산두 진교유적(秦橋遺蹟) 앞에는 시황제의 동상이 동쪽 바다를 보며 서 있고, 재상 이사(李斯)와 방사(方士) 서복(徐福)도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이 중 서복은 좀 더 알아둘 필요가 있다. 서복이 동남동녀 3000명과 함께 불로초를 찾아 동쪽 바다를 떠돌다 우리나라를 거쳐 갔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이인로의 <파한집> 등 옛 문헌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다. 특히 그가 불로초를 찾으러 갔다는 영주산(瀛州山)은 한라산이며, 제주의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은 서복이 다녀갔다는 의미로 붙여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는 결국 불로장생의 명약을 찾아냈을까. 불로초를 찾았으나 시황제에게 돌아오지 않고 스스로 먹어 백살이 넘게 살았다는 전설도 있다고 하니 상상하기 나름이다. 어쨌든 결국 서복은 돌아오지 않았고 시황제는 기원전 210년 이곳 성산두를 두 번째로 방문했던 순행길 도중에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성산두 근처에는 시황묘(始皇庙)도 만들어져 있다. 시황제가 두 번째 들렀을 때 지은 행궁을 후세 사람들이 사당으로 개축한 것이다. 중국에 있는 사당 중 유일하게 시황제를 모신 곳으로 유명하다. 

 

중국 웨이하이 여행기

 

성산두를 내려오는 길에 아직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어촌 마을에 차를 세운다.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물지게를 지고 집으로 향한다. 어선들이 모여 있는 조그만 항구에서는 어부들이 고깃배 손질에 여념이 없다. 한적하기 그지 없는 시골 마을 풍경에 황제에 오르고도 불로장생을 꿈꿨던 시황제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삶에 대한 치열함이야 어느 쪽도 가벼울리 없겠지만, 하늘이 준 수명까지 거스르고자 했던 한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을 떠올리니 왠지 모를 쓸쓸함과 허무함마저 느껴진다.  

 

중국 웨이하이 여행기

 

신이 내린 새들의 별천지, 하이뤼다오 


웨이하이 여행의 마지막 날, 영성이 고향이라는 중국인 여행사 직원의 추천으로 바위섬 하이뤼다오(海驢島)에 가기로 한다. 페리호를 타러 서하구로 가는 길. 소금기 잔뜩 머금은 해풍이 차창을 넘어 시원하게 불어온다. 첫 날 들렀던 마을 앞에서는 주민들이 나와 미역 말리기에 한창이다. 도착한 곳은 하얀 백사장이 길게 펼쳐져 있는 해변가. 이미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배를 타기 위해 매표소 앞에 모여있다.

 

중국 웨이하이 여행기

 

하이뤼다오까지 가는 페리호의 이용 요금은 섬 입장료를 포함해 약 100위안. 우리 돈으로는 2만원 정도다. 결코 적지 않은 가격에도 이렇게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이유는 이 섬이 잘 보존된 바다 새들의 서식지로 유명한 까닭이다. 승선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중국인의 ‘만만디 정신’ 때문인지 배는 도무지 출발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해변에서 느긋하게 기념사진을 찍던 10여 명의 사람들까지 뱃전에 오르고 나서야 선장과 선원들은 슬그머니 출항 준비를 한다. 배를 묶어두었던 밧줄이 풀리고 드디어 출발. 세차게 까만 연기를 내뿜는 디젤 엔진 덕분인지 눈앞에서 선착장이 순식간에 멀어진다. 

 

중국 웨이하이 여행기

 

바다 위 고기잡이 배들을 구경하며 15분의 짧은 항해를 마치면 페리호는 하이뤼다오 선착장에 도착한다. 섬에 들어서자마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사방에서 울어제끼는 갈매기 소리 때문이다. 하이뤼다오에는 괭이갈매기, 재갈매기 등 수만 마리 바다새들이 서식한다. 바위 곳곳마다 둥지를 튼 갈매기들은 자신들의 터전에 들어온 불청객들을 향해 배설물을 쏟아내기도 한다. 이를 미리 알고 온 사람들은 배에서 내리자 마자 우산을 펴든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이들은 행여나 새똥 세례를 받을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섬을 빙 둘러서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정상의 전망대까지 올라간다. 섬을 둘러싼 에메랄드빛 바다 위로 햇살이 쏟아진다. 섬으로 들어오면서 보았던 고깃배들이 저 멀리 수면에 점점이 박혀있다. 


하이뤼다오라는 이름은 ‘바다 위의 당나귀’라는 뜻이다. 머나먼 옛날 신들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길에 바다 한 가운데에서 당나귀 소리가 들려 돌을 던졌더니 당나귀 모양의 섬이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섬 이름의 유래를 설명한 표지판을 보며 어느 장소에나 이야기를  만들어 붙이길 좋아하는 중국인들의 성품을 생각해 본다. 하긴 믿거나 말거나 한 설화일지언정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생겨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중국 웨이하이 여행기

 

하이뤼다오 꼭대기에서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며 2박 3일간의 짧았던 위해 취재를 떠올린다. 촉박한 일정 탓에 도시 전체를 돌아볼 수는 없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리나라를 닮아 있는 웨이하이시의 모습은 어디를 가도 한국 땅에 와 있는 듯 친숙하게 느껴졌다. 가장 먼저 하늘이 열린다는 말은 동쪽 나라 한반도에 그만큼 가깝다는 의미도 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문득 바다 저 멀리 우리나라가 신기루처럼 떠오른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웨이하이(威海, Weihai) | 산둥반도 북동쪽 끝에 위치한 항구도시. 명나라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위소(衛所)를 설치한 뒤로 웨이하이(위해)라 불리게 되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해산물로 유명하고, 수심 12m의 부동항으로 근대 제국주의 국가들의 주목을 받아 한때는 영국과 일본에 의해 점령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웨이하이까지는 항공편으로 약 1시간, 배편으로는 15시간 가량 소요된다.

 

- <KTX 매거진> 2010년 8월호 게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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